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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가볼만한곳 정약용 다산유적지 추천해요

특별한일상

by 귀요미디지 2014. 8. 26.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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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가볼만한곳 추천 

정약용 다산유적지

 

 

 

다산유적지 입구예요

 

 

 

 

입구 옆쪽으로는

다산유적지 안의

정약용 선생 ( 1762 ~ 1836 )의 묘 안내도가 있구요

 

 

 

입구로 들어가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상이 있어요

 

 

 

 

 

 

이길은

정약용 선생의 묘로 가는 계단 이구요

묘 근처는

보안상

사진 촬영금지 구역이예요

 

 

 

정약용 선생 ( 1762 ~ 1836 ) 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 7호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

 

위의  내용은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열수 정약용선생과

숙부인 풍산홍씨 (1761~1838) 와 합장 묘이다

선생의 자는 미용, 호는 사암, 당효는 여유이다.

부친 압해정씨(현재는 나주정씨로 불리움) 재원은

음직으로 진주목사까지 지냈고

모친 숙인 해남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로서 영조 38년 6월16일 열수 (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 (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선생을 낳으셨다.

15세(영조52, 1776)에 풍산홍씨에게 장가드니

무인출신으로 승지와 절도사를 지낸 홍화보의 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 학문을 좋아하였다

16세(정조 1년 1777)에  성호 이익선생의 유저를 처음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사돈이었던 이백과 매형이었던 이승훈을 통해

서양서적에 접하면서

새로운과학지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실학과 서학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한편 선생은 관직에 나아가 나라와 백성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과거시험 공부에 열중한 결과

22세 (정조7년, 1783)에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이어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그 유명한 [ 중용에 관한 문답 ] 으로

정조대왕의 인정을 받았으며

드디어 28세 (정조 13, 1789 )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예정된 대로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청년 관료로서 성장해갔다

문과에 합격한 그 해에 한강의 배다리를

설치하였으며

31세 에는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을 설계하였고

33세에는 홍문관 수찬에 이어 경기 암행어사로

36세때에는 곡산부사로

38세에는 형조 참의로 활약하면서

그 정치적 상황이 좋을 때나 나쁠때를 가리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백성을 위하여

정치적 개혁을 추구해 나아갔다

선생이 속한 남인은 번암 채제공 선생을 영수로 하여

이가환, 권철신, 권일신, 안정복등이 중심이 된

개혁세력으로 정조의 개혁정치를 돠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건적 신분질서와 지주제를 옹호하는 성리학만을 신봉하던

보수집권세력인 노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다

이때 노론은 성리학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서치 않았고 서학은 정적을 없애는 빌미로 이용하게 되었는데

선생도 이로 인하여 고통을 겪게 된다

정승으로 쓰일 큰 제목 인데도 불구하고

유배[(29세  정조 14년 1790)에 예문관 겸열로 발탁되었을 때

노론이 반대하자 그 직을  사양하였는데

왕명을 어겼다 하여 충청도 해미에 10일간 유배되었음]와

좌천[34세(정조 19년, 1795)에

중국인 주 문모 신부의 밀입국 사건의 여파로

정3품 통정대부에서 종 6품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음]

근신[36세(정조21년, 1797) 되던 해6월

동부승지를 제수받아으나 젊은날 서학을

받아들인 것을 반성하는

사직상소문을 올리고 물러나자

곡산부사로 외직에 보내졌음]을 거듭하면서

은인자중하면서 지내야 했으며

끝내 형조참의를 사직하고 1800년 봄에

처자를 데리고 낙향하여

당호를 여유당이라 짓고 은둔하였다

 

그 해 여름에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이후 노론은 11살의 어린 순조를 옹립하고

정순왕후의 섭정아래 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박해사건을 일으켜 모든 정적을 제거한뒤

세도정치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가 선생의 나이 40세로 셋째 형 약종은 죽고

우여곡절 끝에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그리고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47세 (순조8, 1808) 봄에 선생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의 산 밑에 있는 윤다의 산정 (다산초당)으로

이주하여 저술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의 학문에 있어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경학과 경세학 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필생의 역작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도 이 시기에 초고가 이루어졌다.

황상 이강희를 비롯한 18제자를 길렀으며

해장 초의와 같은 고승들과도

귀중한 인연을 맺었다


57세 (순조18, 1818) 가을에 해배되어 고향 마현리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저술을 계속하여 

미완이었던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경세유표를 보완했으며

홍홍신서, 아언각비 등을 저술했다


75세 (현종2, 1836)의 회혼일인 2월 22일 

이곳 마현리 자택의 정침에서 서거하였고

4월 1선생의 유언에 따라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으로

안장되었다


사후 74년만인 1910년 (융회4) 7월 18일 조정에서는

선생을 정이품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으로

추중하고 문도공의 시호를 내렸다.

고 적혀있구요

 

 

다산 정약용 선생은  참으로 강직했기에

 길고도 험난한 삶을 살아간듯 하지만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정말 크리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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